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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귀달

겸선/허백당,함허정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438년(세종 20년)
시대

상세설명

증자헌 병조판서 효손의 아들로 1438년(세종 20년)에 양적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다른 자질이 있어 총명하고 영민하였다. 학문에 게을리 하지 않고 집에 책이 없어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 읽고는 반드시 외워 가지고 돌아 오니 아는 사람은 모두 달리 여겼다. 1459년(세조 5년)에 진사가 되고 1461년에 강릉별시 문가에 제 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 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였다. 1467년 이시애난에 허종의 료좌로 평란에 공이 있어 공조정랑과 예문응교의 벼슬을 겸직하였다.

예문교리를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말과 하는 일이 간절하고 곧았다.무슨일로 성균 사예에 있다가 이부에서 영천군수로 제수하려 하니 문충공(徐居正)이 문한을 외직에 제수함은 불가함을 아뢰어 특명으로 예문전한 겸 홍문전한에 올랐다. 성종이 송도에 행차하려 하자 그때 정승이 여악을 데려가기를 청하자 그는 여악이 불가함을 진술하니 임금도 실수할 뻔 하였다며 정지토록 명했다. 직제학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1479년(성종10년) 가을 충청도 감사로 나갔으나 병으로 체직하고 가선으로 형조참판에 이르고 한성우윤에 옮겼다.

1481년 여름에 봉조하로 천추사로 요양을 거쳐 서참으로 옮겨 조회하러 가는데 겨우 하루분 양식을 주며 질병에 걸리고 장마가 져서 지체되더라도 배급을 더 주지 않아 여행에 군색함이 많았다. 서장관 신종호와 함께 예부에 글을 올려 그 진상을 고하여 배급을 더 받게 되니 그후 조회에 가는 사람들 모두가 그 힘을 입었다. 1491년 어머니의 여묘를 마치고 성균대사성에 올라 학문을 흥기시키고 재주에 따라 일을 맡기니 먼 곳에서 100여명의 선비가 찾아와 가르침 받기를 청했다. 1492년 봄에 자헌으로 지중추를 겸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직되어 이조판서로 옮겨 전과 같이 겸직하였다.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라는 명이 있었으나 풍질이 심하여 글을 올려 사면을 원하니 법을 맡은 이가 기피한다 하여 탄핵 파직되었다가 동지 경연, 춘추관사를 겸하고 성종이 돌아가자 삼도감, 제조관으로 국상을 호상하였다. 정헌에 올라 중국 사신이 올 때 원접사로서 맞았으며 우참찬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좌참잔에 올라 전과 같이 겸했다.
1498년 무오사화 이후로는 대간이 여러 말로 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그는 근심되어 만지장소를 올렸으니, 임금은 대간의 말을 쫓아 정치를 바르게 하고 우박등 재해가 심하니 사냥을 삼가도록 간했으나 많은 신하들은 간하는 바 없이 무조건 사체에 당연하다고만 하니 연산군은 매우 불평히 생각했다.

사적인 일로 편지를 통하였다고 임금께서 그 해 좌천시켜 한직을 주니 홍문과 차자가 작은 허물로 문형을 맡은 대신을 엄벌로 다스림은 불가하니 복직시키도록 간하자 임금은 더욱 분노하여 경기감사로 내쳤다. 궁녀가 옳지 않은 일을 간하다가 그로하여 뜻대로 되지 않자 거짓 죄를 꾸며 경원으로 귀양가게 했다. 그는 집 사람들과 이별할 때 "함창의 한 농부가 재상 지위까지 이르렀으니 이룬것도 나고 패한 것도 나라 안될 일이 있겠는가"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길을 떠났다. 이어서 옥에 가두라는 명령이 내렸고 단천까지 승명관이 달려와 참화를 당하니 1504년(연산군 10년) 6월 22일이고 향년 67세였다. 그는 재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서적을 즐겨 탐하여 학문이 날로 깊어 문장가가 되었다.
1476년(성종 7년) 봄에 기호부 순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 문충공과 60여 운자를 내어 글을 지으니 중국 사신을 능가한다고 칭찬하고 그 글들이 황화집에 실려 이름이 더욱 세상에 떨쳤다. 이후 오래도록 남겨야 할 글은 모두 그에게 청하니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남산 밀에 띠풀로 정자를 짓고 허백이란 현판을 붙이고 공직에 물러 나와서는 폭건에 여장을 잡고 글을 읊으니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그의 풍채와 글을 양모하여 수레와 말 탄 사람이 구름모이듯 하였다. 그가 귀양갈 때 네 아들이 모두 연좌하여 해도로 귀양가고 임금의 명이 엄하여 아이종 두어 사람만이 따랐으니 신후의 일이 더욱 통석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복관되어 일품 벼슬에 증직하고 부의를 보내 제사하고 문광(文匡)이란 시호를 내렸다. 1507년 그의 아들 언승 등이 해도에서 단천에 이르러 고향으로 모셔 3월 13일 지금의 영순면 율곡리에 무덤을 만들었으며 1535년(중종30년)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지방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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