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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철

선여/재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29년(순조 29년)
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성철(性澈)이요 자는 선여(善汝)이며 호는 재헌(齋軒)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1829년(순조 29년)에 태어났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시조(始祖)인 홍천하(洪千河)선생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때 당나라에서 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강명하고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선덕여왕 때 유학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태자 태사(太子 太師)가 되었으며 당성(唐城)으로 본관이 내렸다. 당성백의 후예인 고려개국공신이며 경제공신 삼중대광태사(經濟功臣 三重大匡太師)인 홍은열(洪殷悅)선생을 중시조 1세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당성(唐城)이 남양(南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남양이라 하였다.

선생은 삼중대광태사 홍은열 선생의 33세손이다. 율정 홍천민(栗亭 洪千民)선생은 자가 달가(達可)이고 호는 율정(栗亭) 또는 반항당(盤恒堂)이며 본관은 남양이며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선생의 아들로 1526년(중종 21년)에 태어나 우계 성혼(牛溪 成渾)선생의 문인이다.

1543년(중종 3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553년(명종 8년)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1555년(명종 10년)에 수찬(修撰)으로 사가독서한 후 정언(正言)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문학(文學), 이조정랑(吏曹正郞), 검상(檢詳), 사인(舍人),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560년(명종 15년)에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오르고 다음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1563년(명종 18년)에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조(吏曹)와 형조(刑曹)의 참의(參議)가 되고 1565년(명종 20년)에 대사성(大司成), 예조참의(禮曹參議)등을 지내고 1571년(선조 4년)에 대사성(大司成)에 재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선생은 교지(敎旨)의 작성에 뛰어나 여러 번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으며 청렴하였다.

선생을 율정 홍천민(栗亭 洪千民)선생의 11세손으로 1873년(고종 1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에 오르고 학행이 높았으며 천성이 인자하여 이웃을 도왔으며 자주 찾아드는 흉년에 그때마다 창고를 헐어서 굶주리는 인근 주민들을 구호하였으며 특히 지금의 운문면 방음, 오진, 신원 등 3개 마을의 구휼자만 하여도 수 백호가 된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더구나 선생의 유고(遺稿) 2권이 있었는데 6. 25동란 직전에 적도들에 의해 소실되었음을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고문헌 : 한국인의 족보, 인명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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