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북의 힘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열린도지사실

경상북도 menu
no image

홍녹주부자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를 틈타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나아가 국가를 전복시키는 역신이 있는가 하면 그 음모에 대항하여 신하된 도리를 다한 충신도 있다. 이 충신에 드는 이로 개령(開寧)이 낳은 홍녹주 부자가 있다. 아버지 균은 남양 홍씨다. 1244(고려 고종 21)년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서 서경(평양)을 안무(按撫)했으며 1244(고종 30)년 최우의 명으로 대사성 송국첨과 함께 안남(安南)에 도랑을 파서 바다로 통하게 하려다 여의치 않아 중단한 적도 있다.

원종 때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가 되었다. 특히 그는 서북면을 두 번이나 다스릴 때 선정을 베풀어 생명의 은인으로 서북면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한 지방관으로 몽고족의 침입을 방지한 공로도 컸다. 그 아들 녹주는 무관으로서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고 보존해 놓은 서북면의 병마절도사(西北面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임하자 백성들은 '활불(活佛: 생명을 구제하는 산부처)이 다시 온다'고 기뻐하였다.

부임한 지 10일 만에 최탄(崔坦)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최탄은 서북면 병마기관(西北面 兵馬記官)으로 있었는데 중앙에서 임연(林衍)이 임금을 폐하고 동생인 안경공 창을 대신 세웠을 때 세자(뒤의 충렬왕)는 연경에서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를 타고 최탄은 자신의 음흉한 속셈을 채우려고 서경을 비롯한 자비령 이북의 60개 성을 장악하고 몽고에 귀순하여 몽고 황제에게 군사 3천명까지 얻어서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개칭하고 자신은 총관(憁官)이 되어 서울을 칠 차비를 하고 있었다. 공은 이 지경이 되자, "내 한 몸을 위해 나라를 팔다니!" 통곡하며 성을 빠져 나가 바다에 빠져 죽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도 않았다.

이 때 최탄은, 공이 서북면 일대의 중망(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임연이 무도하게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 조정엔 충신이 없고 백성은 원망해 하고 있다. 공과 더불어 역신 임연을 치는 것이 충신의 도리가 아니겟소?"하고 거사를 제의해 왔다. 공은 속으로, "아버지가 베풀어 놓은 충정에 백성은 나까지도 믿고 의지한다. 나라안의 일로 외세를 빌어 사리사욕을 채우랴!"하고 탈출할 기회만 노렸다.

몽고의 세력이 비록 강대하여 고려를 마음대로 휘두르던 때요 국내적으로는 내란이 잦아 안정을 얻지 못한 때이긴 해도 의지하는 서북면 양민을 이끌고 반란군에 가담하여, 게다가 남의 나라 군사를 빌어 자기 나라를 치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배덕(背德)이었다. 구사일생 탈출에 성공한 공은 개경으로 돌아가 그 뒤에도 1274(원종 15)년 우복야로서 나주도 도지휘사(羅州道都指揮使)가 되어 일본정벌을 위해 원나라가 주문한 조선을 감독했으며 이듬해는 경령전(景靈殿)을 수리했고 1277년 세자 조호(世子 調護)가 되기도 했다. 공의 부자는 내우외환이 잦은 때에 나서 비록 어려운 시기였으나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갔다. 공이 죽은 뒤 나라에서 희순(僖順)이라 시호를 내렸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