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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삼옥

삼옥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99년
시대

상세설명

고로면 학성동 청학 마을에 우뚝 솟은 비각과 단청도 산뜻한 사당이 있으니 곧 삼옥헌(三玉軒) "홍삼옥 여사"의 효열비와 그를 모신 사당이다. 광복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퇴폐풍조에 따라 자칫하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그르칠 우려가 있는 이때 효(孝)와 열(烈)을 한 몸으로 감당해 온 여신(女神)과 같은 거룩한 분이 있으니 바로 삼옥헌 여사이다.

홍여사는 1899년 산성면 무암동에서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의 후예인 홍준복의 셋째 딸로 태어나 명문가에서 부도(婦道)와 범절을 닦아 현모양처의 자질을 아낌없이 익혔다. 나이 15세에 함양 박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박재덕"의 맏아들"종락"의 아내가 되었다. 여사가 출가하였을 때 시가(媤家)의 가세는 말이 아니었다. 작고(作故)한 시모(媤母)의 몽상(蒙喪)중인 데다가 시부(媤父)는 심약한 학자로서 상배(喪配)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불고가사(不顧家事)하니 17세의 남편과 철없는 시제매(媤弟妹) 4남매 등 7인 가족을 부양해야 할 고난과 빈곤의 무거운 짐을 홍여사가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 후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생활 책임자로서 험한 환경을 뚫고 나가는 그 고통이야 어디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항상 외롭게 혼자 계시는 시부를 섬기기에 지성을 다 하였다. 그 후 여사가 33세때 몽매에도 그리던 부군을 따라 일본에 가서 한 가족이 다 모여 살게 되었다. 이제 가사가 안착되는가 하였더니 이 무슨 고약한 운명인지! 도일한 지 3개월만에 부군이 득병하여 백약이 무효하여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고무친의 이국 땅에서의 일이었으니 여사의 원통하고 애통함을 어찌 입으로 옮길 수 있으랴? 부군 와병 시에 할고(割股)의 열행(烈行)이며 임종에 단지(斷指)의 열사(烈事)는 이웃을 경탄케하였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여사는 생각다 못하여 9세의 장남 6세의 차남 생후 20여일의 세아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옛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가이 맞아 주는 이는 없었다.

여사는 아픈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 갈 것을 굳게 다짐하여 청학마을 뒷골 가파른 산을 개간하여 서투르나마 농사도 지었다. 큰 동리를 다니면서 날품, 방아품, 길쌈품, 바느질품 닥치는 데로 아니 해 본 일이 없었으며 오직 노시부와 귀여운 삼 형제의 장래를 위한 모성애의 화신이었다. 철석같은 의지는 불사신이 되어 노력한 보람있어 세 아들이 모두 실업계의 왕자로 군림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 민족을 위하여 성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홍여사는 1970년 71세의 장수(長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보여준 효열의 실행과 굳은 삶의 의지(意志)는 우리들의 모범이 되어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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