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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구

가천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남양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충효겸비(忠孝兼備)한 홍석구(洪錫龜)공은 조선 중종때 무신(武臣) 자(字)는 가천(可天)이며 본관(本貫)은 남양(南陽)이다. 공의 부는 훈련참군(訓練參軍) 승무(繩武)이고 조(祖)는 부사직(副司直) 권(權)이며 증조(曾祖)가 중랑장(中郞將) 담(曇)이다. 고조는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우(佑)이고 6대(代)조가 좌사간(左司諫) 우평(禹平)이다. 공은 백형(伯兄) 철귀(哲龜) 공의 차자(次子)로 적라현(赤羅縣) 응계리(凝溪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질이 호매강건(豪邁剛建)하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나이 7세에 응대하고 진퇴(進退)함이 의젓했고 절의(節義)를 중히 여겼으며 8세에 이미 소학(小學)을 정통하였다. 성장함에 따라 시서와 육예(六藝)의 문을 통하여 무리가운데 우뚝 서서 그 모양이 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큰 뜻이 있고 힘써 배워 일찍이 문무를 겸비하여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사람을 가르치고 몸을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우애가 돈독하고 본받을 만한 말과 착한 행실을 다하였다.

도적(盜賊) 떼들이 이웃집에 와서 가산(家産)을 강탈(强奪)해 가거늘 공이 활을 갖고 따라가서 한 놈을 쏴 죽였는데 도적들이 모두 놀라서 빼앗아가던 물품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모친(母親)의 병이 급급한데 약재료를 시골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므로 3일간의 양식(糧食)을 갖고 도보(徒步)로 서울에 가서 약을 구입하여 왔는데 2일만에 왕복하였으며 가조령(加助嶺)에 이르자 신었던 짚신이 떨어져 버리고 맨발로 집에 왔으며 약을 지어서 드리니 모친의 병이 곧 나았다.

향인(鄕人)들이 모두 그 효성에 경탄하며 또 용기가 놀랍다고 칭송하였다 한다. 공은 부모 섬기기에 생전에는 물론 돌아가신 후에도 조석으로 성묘하며 그 무릎을 꿇인 자리는 파여서 풀이 나지 않았으며 분향하고 호곡하는 소리가 구름을 뚫고 향리로 가니 마을 사람들 모두 천출효자(天出孝子)가 났다고 하였다.

공은 외관(外官)으로 용궁현감(龍宮縣監, 지금의 예천)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의 본을 보였다고 한다. 공의 장자(長子) 준(濬)은 종사랑(從仕郞) 현감이요, 차자(次子) 혼(渾)은 진사(進士)로, 삼자(三子) 호(浩)는 생원(生員)으로써 모두 덕망(德望)과 학문이 높아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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