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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도정 이야기

3. 새마을 운동의 모범부터 현대화와 확산까지

3. 새마을 운동의 모범부터 현대화와 확산까지
새마을 운동의 태동

경북 ‘신도리 마을’ 새마을운동 최초 모범부락으로 선정되다 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1962년부터 1981년까 지 네 차례에 걸쳐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본격 추진 으로 인해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이농(離農) 증가 등 낙후된 농촌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새마 을운동’은 이러한 농촌의 근대화를 위해 제시된 대안이었다. 1970년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농촌근대화와 농어민 소득향상과 농촌근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경상북도 청도군 신도1리는 우리나라 다른 농촌 과 같이 가난하고 낙후된 마을이었다. 당시 신도리 마을 주민들은 마을환경을 개 선하기 위해 조림사업, 제방 공사, 지붕개량, 농로개발, 간이역 설치, 전기가설, 감나무단지 조성 등의 시업을 벌여 고향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주민들은 먼저 길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하고 당시 마을 뒤쪽 골짜기 뒤실 마을과 현재 위치인 새 터 마을을 잇는 ‘토끼길’ 2.5km들 40여 일 만에 폭 4m의 농로로 만들었다. 1959 년 부엌 개량, 축담 개축, 옥내장식 등 가정 가꾸기에 주민끼리 선의의 경쟁을 벌 였다. 1961년에는 부업장려 사업으로 가구당 감 묘목 50그루, 복숭아 10그루, 사과 1000그루 이상 갖기 사업을 시작했다. 1963년 생활개선구락부가 운영됐 고, 1통장 갖기 운동, 새마을금고 육성 등이 이어졌다. 이런 사업을 전개한 결과 신도 1리는 살기 좋은 마을로 변모했다. 196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수해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중 청도군 신도리 마을에 전용 열차를 잠시 멈추고 잘 가꾸어진 마을과 수해복구 작업 을 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22 일 부산에서 개최된 한해대책에 관한 지방장관 회의에서 서면지시를 통해 경산 과 청도를 모범부락으로 선정하였다. 신도리는 1970년 9월 대통령비서실이 간 행한 ‘국토보전’ 화보의 표제 사진으로 실리게 됐고, 다음 지면에도 마을 사람들 이 몇 사람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합해 자조·자립·자위 정신으로 마을개발사업 을 펼치고 성과를 거둔 마을로 소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에도 경북 청도역 남쪽 모범부락이라며 신도마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이에 대통령 비서실은 신도리 중심의 경북 청도군 경부연선 단위지역 개발계획을 세우고 신 도마을을 포함한 이 나라 이 강산 우리의 새마을 책자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75년 도곡마을 20여 호를 신기마을로 합치고, 1976년 마을 전체를 양옥으로 개조하는 등 성공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관심과 정부의 시멘트 공급 시책 등 새마을운동이 점화되면서 본보기 마을을 견학해야 한다는 바람이 불어 신도마을은 전국에서 방문객이 몰 려들었다. 이로써 청도군 신도리 마을은 한국 근대화의 시초가 된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농촌근대화 사업은 1969년 11월 ‘농촌근대화촉 진법’으로 촉발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농업 전문가 류태영(1936~, 전 건국대 부총장)의 건의로 시작된 농촌 계몽 및 환경개선 사업은 정권으로서는 단시일 내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매력적 정책이었다. 정책 집 행을 위해 농지를 개량·개발·보전 및 집단화하고 기계화에 의한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방안과 함께 농가주택을 개량함으로써 농촌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방안을 담 은 농촌근대화촉진법이 1970년에 제정되었다. 이 법은 총 190조항과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농업생산력 증진과 농촌근 대화 촉진을 위하여 농지개량조합과 농업진흥공사를 법인으로 설립하는 것이다. 농지개량조합은 조합구역안 농지개량시설의 유지·관리와 구획 정리사업 등을, 농업진흥공사는 농지개량사업 및 농업기계화사업, 농가주택 개량사업 등을 수행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해당 법률에 의거 법인으로 농지개량조합 및 농업진흥 공사가 설립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1966).1962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1966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 1971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 1976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 1981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6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7-1991). 1986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경북 ‘신도리 마을’ 새마을운동 최초 모범부락으로 선정되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1966).1962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1966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 1971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 1976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 1981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6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7-1991). 1986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발상지 청도 - 새마을운동 42년 발자취
새마을운동발상지 청도 - 새마을운동 42년 발자취
경제부흥 계획서
경제부흥 계획서
새마을 운동의 전개

농촌을 중심으로 본격적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시작하다: 경북 문성리 시범부락선정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 농촌 현대화를 추구하며 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다. 새 마을 가꾸기 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초기 형태로,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해 근면·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면서 시작했다. 1972년 3월 7일 전 국무위원, 지방장관 및 교육감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생산과 직결 되는 산교육의 실천 및 국난 극복의 구국정신 고취 등을 골자로 한 특별유시를 발 표함으로써 새마을 운동이 체계적으로 정비/보급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마을 차원의 환경개선은 새마을운동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분야이기도 했 다. 새마을운동의 이름으로 추진된 여러 사업 중에서 1971년에 설정한 10년 목표치를 초과 달성한 사업은 주로 도로 확장, 마을회관 건립, 다리 건설 등 마을 공동의 복리를 추구하는 생활환경 개선사업이었다. 생활환경 개선사업의 경우 사업으로부터의 혜택이 마을 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갔기 때문에 주민들의 참여도가 높았다. 따라서 소득증대 사업의 경우 마을마다 성과가 크게 엇갈린 반면 생활환경 개선사업에서는 대다수 마을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공동체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원 등과 같은 적극적인 동참자들이 있었 기에 가능하였다. 정부는 1972년 마을별로 새마을지도자를 위촉하고 새마을교육을 우선적으로 실시하는 등 새마을운동의 주도체로 육성하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정부는 새마을지도자증 발급, 영농자금 우선 대부, 대중교통 할인 혜택, 의료수혜, 각종 세금 면제, 우수지도자의 월간 경제동향 보고회 참여 등 다양한 물질적·심리적 보상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새마을지도자들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활성화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농촌근대화의 기수’로 거듭날 수 있었다. 농촌새마을운동에 대표적 모범이 된 마을에는 경북 문성리 마을이 있었다. 1971년 9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및 전국시장ㆍ군수가 참여한 비교 행정 현지회의에서 경북 영일군 기계면 문성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새마을 운동 시범부락으로 선정됐다. 문성리는 농촌 새마을운동 제창 직후 제1차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서 가장 우수한 마을이었다. 영일군 기계면 문성리의 성공사례는 그 당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본보기로 삼았다. 1971년 9월 17일과 18일에는 제1년차 새마을 가꾸기 운동의 성과를 살펴보고 향후 추진될 제2년차 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전국 시장 군수 비교행정회의’가 개최됐다. 전국 시장, 군수를 비롯한 355명이 참석한 회의 첫날 문성리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변화된 문성리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다른 마을도 본받을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문성리와 같은 마을 을 만들어라’고 주문함으로써 문성리를 새마을 가꾸기 운동의 모범사례로 제시 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시장 · 군수에게 ‘새마을정신 주입에 점화역할을 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자조· 자립·협동이 새마을정신임을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성리에 전화 사업을 우선으로 시행해 줄 것을 지시했다. 영일군 기계면 문성리의 성공은 새마을운동 성공에 반신반의하던 반대 논란을 잠재웠을 뿐 아니라 혁신적인 마을개선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마을지도자와 주민의 단결이 사업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문성리의 성공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대표적인 성공모델이다. 문성리의 성공을 직접 목격한 전국의 시장, 군수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새마을운동을 전국적으 로 빠르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운동의 기반조성기(1970년~1973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농촌 새마을운동의 역점과제는 먼저, 생활환경개선을 위하여 마을 안길확장, 지붕개량·담장개량 등 농촌주택개선, 공동시설물 설치 등이었다. 이를 통해 농촌사회의 일상이 근대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여 변화하였다. 다음으로 소 득증대를 위하여 농로개설, 농지정리, 종자개량, 계·품앗이 장려 등 농업기반시설 확충 및 협동영농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비록 단기적이고 제한적이었지만 1960년대 초래된 도농격차의 심화가 완화되고 실질적인 농가소득 증대의 효과 가 나타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의식개혁을 위하여 퇴폐풍조 일소, 협동분위기 조성, 근검절약의 실천 등을 통하여 건전한 의식과 합리적 생활방식을 제고하였 다. 이에 따라 농촌마을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졌던 도박이 근절되고 공동체적 전통문화에 대한 농촌마을의 인식이 고양되면서 근대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이 처럼 새마을운동은 마을공동체 안에서 구성원 공동의 노력을 통해 소득증대와 환경개선이라는 양대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농촌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고 자 하는 시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큰영애 경상북도 주최 구미공단 공장 새마을 전진대회 참석. 1977. - 경상북도 영상기록관

제일모직 새마을공장 준공. 1976
제일모직 새마을공장 준공. 1976
경상북도 공장새마을운동 경진대회. 1985.
경상북도 공장새마을운동 경진대회. 1985.
대학의 새마을교육 추진계획(문교부)
대학의 새마을교육 추진계획(문교부)

도시와 공장에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다 농촌에서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도시 새마을운동으 로 전개되었고, 특히 직장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직원들의 상호 결속력 을 강화하고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전국적으로,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정부가 정책을 개발 하고 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어 농가소득 증대, 빈곤 극복, 도농 간 격차 해소, 그리고 조국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던 시기이다. 도시에서는 도농교류와 자연보호활동 등을 통한 공동체의식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도시지역의 공동체의식 함양을 위하여 도농자매결 연, 농촌봉사활동 등이 시행되어 도농 사이의 일체감을 조성하기 위한 시도가 일 어났으며, 불우이웃돕기·골목길 개선·내 집 앞 쓸기·질서 지키기·자연보호 등의 사업을 통하여 공동체적 전통문화 복원이 시도되었다. 이렇게 도시 새마을 운동 은 지역 새마을운동·부녀 새마을운동·직장 새마을운동 등으로 분화하였다. 도시 새마을운동의 촉진을 위한 10대 구심사업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 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오물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이었다. 이에 대한 실천은 지역 내 반상회를 새마을운동의 모체로 삼고 지역 단위의 사업전개와 직장을 통한 사업전개로 확대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노동시장의 변화는 임금문제와 맞물려 노동력의 안 정적 수급 문제와 노사갈등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는 각 노동주체들의 이견을 조율할 새로운 정책수단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9월 모범기업은 작은 국가와 같다면서 기업의 공장 새마을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공장 새마을운 동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초기 농촌새마을운동의 성공에 힘입어 중후반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새롭게 주목받았다. 공장 새마을운동은 1973년 4월 전국경제인대회에서 전국경제인 5개 실천요강이 채택되고 동년 9월 공장 새마을운동 간담회(상공부, 경제4단체)를 거쳐 12월 공장 새마을운동의 기본구상으로 정식화되었다. 시범공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초기 공장 새마을운동 은 기업인의 정부정책 참여를 강조했기 때문에 기업인 새마을운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장새마을 운동의 주무부처는 상공부였으나 1976년 이후 내무부, 노동청 들이 나서서 생산적 노사협조를 강조하였다. 공장에서는 새마을운동의 전개를 위한 다양한 조직들이 만들어졌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업이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 노사안정 및 생산성 제고를 위해 산업체 학교 설치, 공장 내 복지시설 확충 등의 사업이 시행되어 비록 초보적 수준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학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새마을운동을 실험하다 당시 문교부는 1971년 3월 17일 제1회의실에서 전국대학 총학장 회의를 열고 각 대학이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도적 역할을 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문교부는 새마을교육추진의 첫 출발로 행정적 책임과 지도체계 확립을 위한 교육담당관을 배치하였다. 이후 시도교육위원회 및 시군교육청에 새마을 담당 장학사와 각 급 학교에 새마을 담당교사 등 전담요원을 배치하고 지도자대회 를 개최하며 총력안보와 새마을교육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와 함께 지도자 훈련을 위해 시도 학무국장 및 마을 담당 장학연수회를 가지기도 했으며 시군 장학 사 일선교사 연수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각 시도 교육위원회와 교육청에서는 나름의 새마을교육 추진 기구를 수립하고 행정력을 강화했다. 초·중·고·대학교 등 각 급 학교는 자활학교운영, 향토개발연구, 통일 동산 만들기, 학교저축운동, 산업 협동체제 강화, 상설 새마을학교 운영 등에 주력했다. 이러한 일을 전담하기 위해 초중등학교에는 새마을 담당교사(새마을주임교사)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시교육위원회는 사립중·고교에 대해서도 새 마을 주임교사제를 권장했다. 문교부는 새마을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각 급 학교를 `새마을운동 센터`로 삼아 새로운 사회기풍을 조성한다는 것을 골자로하는 `새마을교육 3개년 계획`을 1972년 3월 8일 확정했다. 문교부는 전국의 모 든 학교기능을 새마을운동과 지역사회발전에 투입, 종전의 `온마을 교육 새마을교육으로 명칭을 바꾸고 1974년까지 초·중·고·대학교 등 각 급 학교에서 새마을교육을 실시하였다. 1972년 11월 10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새마을 운동에 관계하고 있는 중앙 및 지방대학의 200명의 평가교수단이 새마을운동 심포지엄을 열어 10월 유신과 관 련된 새마을 운동의 이념과 효과적인 추진방법에 대한 토의를 거치면서 새마을 운동은 이론정립의 단계에 이르렀다. 해당 심포지엄의 참여 교수들은 새마을운 동과 이를 모체로 하는 10월 유신의 성취에 적극 참여하여 그 중추적 역할을 담 당할 것을 결의했다. 1972년부터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관련 조직이 설치되었고 (내무부 지방국 새마을지도과,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새마을운동중앙연수 원의 전신)이 신설되었다. 특히 1972년 3월 7일 대통령령으로 `마을운동중앙 협의회` 설립됐다. 새마을중앙협의회 규정에 의해 내부보 내에 신설된 새마을 중앙협의회는 새마을운동이 전국 전기관의 유기적인 조직 하에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문교부가 새마을운동 추진체로서 문교본부와 각급 교육행정 지도기관 및 학교에 1972년 3월 31일까지 전담요원을 배치했다. 그 리고 같은 해 3월 24일에서 25일에 걸쳐 대구에서 올바른 국가관의 교육지침을 확립하고, 총력안보, 새마을운동의 선도를 다짐하는 `전국교육자대회` 개최했다.

새마을 운동의 확장 발전

국민정신운동으로 계승하다 1980년대에 들어 새마을운동은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으면서 과도기적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새마을운동중앙회가 발족하면서 정부가 추진하 던 방식에서 민간단체 중심으로 활동주체가 바뀌게 된다. 1980년대는 1970년 대에 이룩했던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기반으로 국민의식수준 고양 등 국민정신운 동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시기로 민관이 함께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88올림픽이 개최되고,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창립되어 본격적으로 민간중심의 새마을운동이 진행되었으며 선진시민의식함양운동을 중심으로 정신운동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새마을운동을 주관했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1980년 12월 1일 사 단법인 인가를 받아 창립하였다. 새마을운동이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와 민 간의 합동추진형태로 전환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 소속이었던 새마을중앙 협의회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민영화하였다.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 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됨에 따라서 민간주도적인 추진조직으 로의 정착을 위한 체제건설사업(體制建設事業)이 전개되면서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 한 조사·연구사업 등이 다각적으로 시행되었다.

관보제8717호: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법률제3269호). 1980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새마을 세계화 10년사, 2015 – 경상북도 새마을세계화재단 새마을 세계화 사진전, 2013 – 경상북도청 영상기록관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 백서. 2009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조성 기본계획 연구. 2011 – 경상북도청 기록관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조성사업(기본 설계도면). 2012 – 경상북도청 기록관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 조감도. 2009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 조감도. 2009
새마을 관련업무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위한 해외 보급팀 신설 계획(안). 2011
새마을 관련업무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위한 해외 보급팀 신설 계획(안). 2011

경북!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위해 공헌하다 2000년대에 경북은 새마을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세계화시키려는 노력의 중심에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2012년 영남대학교에 박정희새마을 대학원이 출범이었다. 영남대학교는 2012년 8월 27일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의 2012학년도 1기 입학식을 개최하고, 첫 신입생으로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15개 국가에서 온 고위공무원과 공기업 임원, 정치인, 사회운동가 등 외국인 30명과 내국인 2명, 총 32명이 입학했다. 대학원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경영철학과 새마을 운동의 성과를 전승, 연구, 세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새마을 세계화재단의 설립이었다. 경상북도는 2012년 행정안전부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아 경북 구미시에 재단 법인으로 새마을세계화재단을 설립했다. 2013년부터 새마을운동 경험을 국제 사회와 공유해 인류사회의 빈곤퇴치에 기여하기 위해 새마을 세계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15년 주 세네갈 사무소를 시작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개국 35개 마을에서 새마을시범마을 조성사업을 진행 중이다. 경상북도는 잊혀 가던 새마을운동 정신 부활을 시작으로 다각적인 학술연구 등을 통해 현시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새롭게 계승하였다. 2009년 9월에는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라는 대규모 행사를 통해 새마을 운동의 역사·문화·정신을 집 대성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2018년 11월 구미시에는 새마을운동 테마공원을 조성했다. 이 공원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전시, 교육, 체험, 휴양기능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새마을운동을 한자리에서 보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이다. 이 공간은 새마을운동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는 새마을운동과 새마을 정신 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새마을 운동을 겪은 세대에게는 새 마을운동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신세대와 새마을운동에 대해 교감할 수 있 는 소통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경상북도는 2000년 이후부터 새마을 운동을 ‘신(新) 농촌개발 패러다임’으로 발전시켜 개도국의 농촌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새마을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2005년부터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파하기 위해 대륙별 거점지역에 새마 을연수센터를 건립하고 새마을 국제연맹을 설립해 비정부국제기구를 만드는 등 새마을 운동 보급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경북의 이러한 활동은 새 마을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세계에 보급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중공업의 중심 경북 포항제철 창립으로 대한민국 산업의 메카로 자리잡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년~1971년)으로 경부고속도로건설, 중 공업육성정책과 함께 철강공업의 전략적 필요성이 인정되어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장기적인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963년에 5개국 8개사의 연 합체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 어 1968년까지 예비협정, 기본협정, 추가협정의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이 이루어졌다. KISA와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1967년 7월에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같 은 해 9월에는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박태준 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대한중석을 모태로 한 포항제철이 창립되었다. 철강을 일관(一貫)하여 생산하는 포항제철의 생산력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1976년 5월 제2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 조강기준 연산 260만t 규모로 확대되 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조강기준 연산 550만t 규모의 제3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했다. 1981년 2월에는 조강기준 연산 850만t 규모의 제4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했는데, 제3기 준공 당시 철강수요의 지속적인 증가추세 전망으로 제2제철 공장의 건설계획이 수립·추진되었다. 1987년 5월 조강기준 연산 270만t 규모의 광양 제1기 설비공사가 완공되었고, 1988년 10월에는 동일규모로 제2기 설비공사가 준공되었다. 포항종합제철은 포항의 일관제철소에 이어 광양에 제1·2기 설 비를 가동하여 설비능력 확대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어 포항제철은 조강기 준 연산 270만t 규모의 광양 제3기 설비확장사업을 1990년 완공하고 조강기준 연산 330만t 규모의 광양 제3기 설비확장 사업을 1990년에 준공하였다. 마지막 으로 조강기준 연산 330만t 규모의 제4기 설비확장 사업이 1992년 완공되어 조강자급률을 더욱 증가시켰다. 포항제철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시기 세무조사로 인해 박태준 회장이 일본으 로 떠나는 등 기존체제가 흔들리면서 위기를 겪었다. 박태준 회장은 이후 1997 년경 재보선을 거쳐 정계에 복귀하면서 DJP연합의 한 축인 자민련 총재를 역임 했다. DJP연합으로 당선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포항제철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사이 포항제철은 1994년에는 뉴욕증권거래소, 1995년에는 런던증권거래소에 각각 상장되는 등 기업 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1998년 7월 3일 정부는 정부 및 산업은 행의 보유주식지분 26.7%를 1인당 3% 한도로 내·외국인에게 분산 매각하는 방안 을 발표하였다. 이후 정부 및 산업은행 지 분은 차례로 매각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2000년 10월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36%를 매각함으로써 포스코는 민영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002년에는 공식 회사명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서 포스코로 변경하였다. 2013년 12월 23일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찔레곤에서 연간 300만 톤 규모의 용 광로에 첫 불을 지피는 ‘화입(火入)식’을 개최했다. 1973년 6월 포항 영일만에 용 광로를 가동한지 40년 만에 첫 해외 용광로가 가동했다. 이는 포스코가 해외 최 고 수준의 철강회사로 거듭났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성과는 포스코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철강 산업 발전의 역사이며, 경북이 산업근대화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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