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자는 유재(幼材)요 호는 밀암(密庵)이니, 이조판서 갈암 이 현일(葛庵 李 玄逸)선생의 아들로서 1657년(孝宗 8年 丁酉) 수비면 반곡리(盤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 재질이 비범(非凡)하고 문장이 일찍 능하여 유학(儒學)에 통달하였으므로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빼어난 조모 장씨(貞夫人)가 손자를 심히 귀여워하였다. 중부(存齋 李 徽逸 先生)로부터 글을 배울 제 태극(太極)과 중용(中庸)을 강학(講學)하면서 감탄(感歎)하는 말이 「이 아이의 견식(見識)에 나는 따를 수 없다」하였다. 학동(學童)이 성장하여 선대(先代)의 갈암학통(葛庵學統)을 이은 성리학자(性理學子)로서, 밀암학설(密庵學說)로 일가견(一家見)을 세운 석학(碩學)이 되었다.
일찍이 아버님을 따라 상경(上京)하니 재상(宰相)들이 젊은 학자의 명성(名聲)을 듣고 애중(愛重)히 여겨 과거에 응시(應試)하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으니 아초(兒初)부터 벼슬에 뜻이 없고 오로지 학구(學究)에만 정려(精勵)한 학자의 자세(姿勢)였다. 1694년(肅宗 20年 甲戌)의 정변(政變)으로 아버지가 북천남적(北遷南謫) 고생할 때에 수종(隨從)하면서 고행(苦行)하는 효도(孝道)가 지극하였다.
만년(晩年)에 소옥(小屋)을 세워 밀암(密庵)이라 호를 지었다. 영조(英祖)때에 장악주부(掌樂主簿)를 제수(除授)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에 중신(重臣) 조 현명(趙 顯命), 오 광운(吳 光運)이 밀암을 영남 제 1인자(嶺南第一人者)로 천거(薦擧)하여 크게 등용(登用)코자 했으나 시사(時事)가 일변(一變)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관직(官職)보다도 학자로서 부전자전(父傳子傳)의 학통(學統)을 빛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