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권수경의 자는 자정, 호는 자락당, 관향은 안동 임진왜란때 의성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공을 많이 세운 희순의 외아들로 1584년 12월 26일에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모습이 밝고 훤했으며 도량도 넓었다. 아홉 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의병장으로 나아가 세 성을 지킬 때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는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정성드려 아버지의 무운장구를 빌었다.
여헌 장현광은 그의 할아버지 무성이 백세를 수하였다고 자상선이라 불렀다. "장래 큰 인물을 두어 걱정이 없다."고 그의 5언절구인 '몇 만명 적을 당해 낼 무술 익혀 그들을 휩쓸어 버리고 태평성대 이루어 볼고'란 글을 보고 찬탄함을 말지 않았던 바다. 10세에 문예가 이뤄지고 15세때 전상으로 신음중인 아버지를 잃어 슬퍼함이 예를 넘치게 하니 이웃 사람들이 칭찬않은 이가 없었다.
힌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서도 항상 동료보다 재질이 뛰어났으며 19세 때는 향시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1616년 병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다음 정사년엔 조부상을 입는 등 큰 상을 당할 때마다 통곡 기절하고 그 초종장례를 예에 어긋남 없게 하고 묘 아래 여막을 짓고 손수 음식을 바쳐 가며 3년시묘를 눈비 무릅쓰고 빠짐없이 치루었다. 이렇게 정성스레 묘를 수호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가 시묘 산 골짜기를 효려동이라 불러 왔었다.
37세 때 재능 참봉 제수를 안 받았고 이의준이 과거 보기를 권하였으나 마다하고 사자 육경 익히는 것을 본분으로 여겨 영귀 서당을 재건하여 후진 양성과 '자락당'이란 정자를 이룩해 자호로 삼았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늘 재물에 욕심을 내지 말기를 훈계하고 유학 서적 읽기를 권장했다. 그의 장인 이형남과 신열도 등은 퇴계 문인으로 손색이 없다고 공을 추켜 세웠고, 국기일인 2월 1일 선조 임금의 제삿날을 맞이하여서는 하루 종일 근신한 처지였다.
광해군 때 명.금 두 나라와 관계를 병존시켰으나 인조 반정 뒤 북인을 대신해 서인이 정권을 잡자 금에 대한 태도가 일변하여 후금을 배척하고 친명 정책을 조정서는 쓰게 되었다. 또 명장 모문용이 우리 나라에 의탁하여 후금을 괴롭혔으나 때마침 이괄의 무리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우리나라에의 침입을 권하니 후금 태종은 아민으로 하여금 3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이 같이 북쪽 오랑캐가 덮친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을 맞아 조국이 위기에 놓이매 공은 앞장서 의병을 일으켜 한번 죽음으로 국은을 갚으려 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을 의병장으로 추천 좌도 호소사 장현광이 좌도의병도유사로 삼아 전승에 이바지하게 했다. 적이 물러난 뒤 정경세 우도 호소사는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의성 의장 권수경은 모병과 군량 조달에 절력을 다하고 그 사람됨이 백가지 일을 맡겨도 해낼 인물'이라 썼다. 그로 부터 9년 뒤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그 모획이 정묘때와 같았으니 의장 부장인 홍인성 등과 더불어 문경 새재까지 출진, 조정서 강화했다는 소식을 접하매 통곡하고 돌아온 뒤부터는 세상일에 뜻없고 오직 '자락당'에 묻혀 인간의 도리를 닦고 노후를 보냈다.
1659년(효종 10년)을 기해 정월 23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76으로 고운사 뒷산 동쪽 기슭에 묻히었다. 그 해 7월에 우암 송시열의 장계로 가선대부 돈녕부사에 증직되고 그 뒤 벼슬이 더해져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그의 유고로 기여집 5권과 담총집 4권이 있는데 전자는 옛성현들의 언행과 백성을 다스리고 군을 통솔, 세상 구제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후자는 사람의 옳은 도리와 당시 여러 선비와의 왕복한 서신과 부록으로 물건 쓰는 치산의 내용 등 선인들의 말을 인용한 역저였다.
자락당 유집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