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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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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심

중성/일성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54년(명종 9년 )
시대

상세설명

자는 중성(中星), 호는 일성(日省) 관향은 안동이며, 안동에서 옛 신령현 추곡리(楸谷里)로 입향한 구의헌(九宜軒), 권열(權 )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덕온(權德溫)이고, 1554년(명종 9년 갑인) 에 추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담이 크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용기가 있었고 힘이 세었다.

30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바람 앞에 깜박이는 등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자 재종형 권 응수장군의 형제와 그의 동생 응기(應箕)와 같은 고을 이온수(李蘊秀) 정응거(程應 )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대동(大洞)(현, 금호읍 대미동), 한천(漢川)(현, 화북면 삼창동)에서 적을 무찌르기 시작해서 박연(朴淵)(현, 촤산면)에서는 영천, 하양, 의흥, 의병들과 합세하여 적을 쳐부수어 실의에 차있던 우리 국민에게 달아나는 적군을 소계(召溪)까지 쫓고, 한편 영천 쪽으로 달아난 적이 화북면 사천근처에서 들락거리므로 이를 쫓으니 적은 크게 위축 되어 영천성으로 달아났다.

이에 힘입은 우리 의병은 영천성을 탈환할 계략을 여러 고을 의병장들과 세웠다. 섶나무를 준비하여 화공할 준비와 긴 나무를 베어 성을 넘어 사다리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우리 의병은 그해 7월 26일부터 공격을 시작 27일에는 왜놈을 모조리 잡아 영천성이 회복되었다.

8월에는 안강, 계연(鷄淵)에서, 경주에서 싸워 적을 무찔렀다. 이 공훈으로 권 응심장군은 1593년 수문장이 되어 문경 당교(唐橋), 안동 구담(九潭)에서 연이어 적을 격파하고, 1594년 4월에는 황룡사에서 적을 잡아 왕세자 행궁에 바치니 크게 칭찬을 받았고, 그 해 8월에는 무파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훈련원정이 되어 경주 의병 권사악(權士 ), 손시(孫時)등과 함께 형상강의 적을 크게 무찔렀다.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고 싸울 때마다 큰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597년(선조 30년 정유)에 적은 다시 우리의 강토를 짓밟아 쳐들어 왔다, 이 때 경상우방어사로 있던 곽 재우(郭再佑) 장군은 "권 응수, 권 응심 두 장수만 있으며 적을 어찌 무찌르지 못 하겠느냐?" 고 했었다.

그 해 11월에 지위장군 수 경상좌도 병마우후가 되어 여러 의병장과 중국장수 양호(楊鎬)와 함께 울산 반구정(伴鷗정)에서 영천복성 때와 같이 화공으로 적을 태워죽이고, 도산(島山)에 몰려 있던 적을 포위하여 진 종일 싸워 많은 적을 잡아 죽였다.

다음 날인 12월 21일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밀고 밀리는 전투 속에 용감 무쌍하던 그는 그만 적의 화살에 맞아 김응택(金應澤)의장과 함께 장열하게 44세를 일기로 전사하고 말았다. 동생 응기는 꽂힌 화살을 뽑았으나 원통하게도 그는 숨을 거두었다.

재종형인 권 응수장군의 의진에서 십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언제나 선등해서 적을 무찌르고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그는 항상 말하기를
"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다.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나의 충성의간(忠肝)과 의리의 슬개(義膝)를 나라는 알고 있을 것이다."
고 말한 그대로 나라를 위해 순국했다.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이 뛰어남을 높혀 승정원 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으로, 다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으로 증직하고 선무원종 1등으로 기록되고, 충의공 권 응수 자운과 함께 귀천서원에 제향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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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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