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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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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렬(片康烈)

애사(愛史)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절강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편강렬의 본관은 절강, 호는 애사인데 시조는 중국 절강에서 임진란때 유격장으로 우리 나라에 파견되어 평양 공략과 울산에서 전승하고 큰 공을 세워 울산 층암상에 "정왜승첩비가 세워진 명장이며, 그가 우리 나라에 정착하고 후손은 대대로 무덕을 이어받아 강렬의 조부는 무과를 거쳐 사과, 평정부사를 지냈고, 아버지는 한말 국운이 위태로워졌을 때 고향에서 양진의숙을 개설하고 구국정신과 항일사상을 가르친 분이다.

강렬은 4형제 모두가 위국진충하는 가풍 속에서 1892년 태어난 곳이 연백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니 전국에서 일어나 의병은 항일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여 각처에서 일본군과 충돌하였는데 이때 강렬은 16세인 어린 나이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강년 의병대장의 본거지인 태백산 군진으로 달려 갔다.

이대장은 16세 소년의 당돌한 행동이 기특하기도 하고 의심도 가서 곁에 두고 거동을 살피니 청장년보다 오히려 용감하고 침착함이 뛰어난지라 그를 소모장으로 발탁하였다.

때마침 1908년 3월에 전국 의병들은 산발적인 항쟁을 지양하고 일대 종합군을 편성하여야 한다는 경기도 의병대장 허위의 제창에 따라 각 도 의병 대장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해 11월을 기하여 각 도 70여 의병군을 양주에 모아 12만 대군을 편성하여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수도 탈환에 합의하고 때를 기다렸다.

기약한 날이 다가와 충청도 의병대장 이강년은 양주 출신의 선봉장으로 17세나는 편강렬을 임명하고 백여병을 선발대로 인솔케 하여 약속한 날에 맞추어 동해안을 돌아 강릉을 거쳐 양주로 향했다. 양주에 약속대로 당도한 의병군은 충청도의 이강년군, 경기도의 허위군, 경상도의 신돌석군등 만여명에 불과하였다.

이 의병군 마저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는데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미리 이곳에서 대기하던 일본군관 접전하게 되었다. 편강렬 선봉장은 "여러분, 민족과 국가를 위해 최후의 일인 일각까지 후퇴말고 싸워라" 고 부하 군졸을 독려하면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기를 3일간 계속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강렬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태백산 본진으로 돌아갔다.

치료하며 재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1909년 봄에 백형 수열이 본진으로 찾아와 하는 수없이 연백군 봉산면 본가로 돌아왔다.

1910년 공부를 핑계로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에 다니면서 다시 동지규합에 나섰으나 일본 경찰은 양주 전투때의 선봉장이던 사실을 탐지하고 요시찰인들로 점찍고 감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데라우찌 총독 모살사건이 일어났다.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는 데라우찌 총독을 안명근이 선천역에서 살해하려다가 미수로 끝난 사건인데, 일경은 이를 기화로 민족독립운동자를 일망타진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새해 신정을 기하여 전국에 손을 뻗쳐 윤치호, 김구, 양기탁, 편강렬 등 105명을 기소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05인 사건인데, 편강렬이 21세에 옥에서 풀려나자 국권회복운동에 몸받치기로 결심하고 연백군 본가에 내려가 일찍 선친이 경영하던 양진의숙에서 교편을 잡아 청소년을 규합하여 독립사상을 가르치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매일같은 감시로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자 1914년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는 선고향 금릉면 진목동 5촌 당숙집으로 내려와 이곳을 본거지로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는데 그의 본격적인 운동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첫 사업이 개령면 덕촌동 이공진 집에 서당을 개설하고 대구 우국지사 곽돈 선생을 사부로 모시고 청년 30여명을 모아 항일 독립사상을 가르치는 한편 직지사 뒤 삼성암에 데리고 가서 피나는 훈련으로 무술을 가르쳤다.

그의 무술과 용력은 2m 40cm 의 장신에 어울리는 초인적인 것이었는데, 혼자서 화물기차를 끌었고 한팔에 장정 4사람을 주렁주렁 매달아 강물을 건네 주었으며, 아무리 큰 초가집 이엉도 막대기에 끼워서 힘들이지 않고 지붕에 던져 옮겼다. 거구인데도 무술로 익힌 몸은 빨라 웬만한 지붕위를 사뿐사뿐 뛰어 넘었고, 보통사람 키높이의 빨랫줄을 어린이 고무줄놀이하듯 요리조리 뛰어 넘었으며, 김천 남산동에 있었던 경천사 마당에 서있는 2m 높이의 석탑을 모듬발로 뛰어 넘었다.

5년간 김천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때를 기다리는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곳보다 동지들이 많은 연백으로 달려가 동아일보 지국장의 신분으로 위장 하고 황해도 일대에서 지사들을 규합하려고 동분서주했다. 이명서가 조직하는 구월산대 조직에 참여하고 이를 넓혀나가는 한편 상해 임시 정부 연락원으로 있던 편강렬의 아우 덕렬을 상해로 밀파하여 국내외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다가 구월산대가 노출되어 강렬은 그의 중형 부열 등 6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구금되었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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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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