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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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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洪瑋)

위부/서담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남양
출생시기
1559년(명종 14년)
시대

상세설명

홍위(洪瑋)의 본관은 남양(南陽)이요 자는 위부(偉夫) 호를 서담(西潭)이라 하였으며 1559년(명종 14년)에 태어났다. 군위군에 처음 입향한 선조는 6대조인 홍계강(洪季康)공이다. 군위군 서리면(西里面 : 현재 군위읍)에서 홍소(洪訴)의 아들로 태어나 천성이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도덕과 의리를 앞세워 처세하였다.

서애 유성룡(柳成龍) 선생으로부터 마음가짐과 행실의 바른 도리를 배워 모든 행실에 조심하며 스스로 반성하였다. 1587년 선조때 생원이 되었고 1601년 신축식년(辛丑式年)에 병과(兵科)에 급제하여 양사(兩司)에 출입하였다. 광해군때 참소를 당하여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으나 일편단심 나라를 걱정하고 있던 중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병조 정랑(兵曹正郞)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가 1624년 부친상을 당하여 임금님에게 상주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친상을 치루었다.

일찍이 학례강관(學禮講官)이 되어 어떤 정승의 조카에게 소학을 가르쳤는데 여러 번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므로 그를 쫓아 버렸다. 함께 있던 다른 선비들이 "정승의 조카인데 쫓아낼 수 있습니까?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만류하였으나 서담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정승이 이 소식을 듣고 조카의 재주 없음을 한탄하며 가로되 "서담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니 후에 크게 쓸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또한 흥양(興陽)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사람들 수 십 명이 책을 가지고 와서 글 배우기를 간청하였으므로 이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재주에 따라 정도를 달리하여 가르치니 배우는 사람도 열과 성을 다하여 배워 얼마 안되어 공부는 일취월장하였다. 그러므로 서담공이 흥양을 떠날 때는 그로부터 글을 배웠던 여러 사람이 귀양살이가 풀린데 대하여 기뻐하는 한편 이별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서담공은 학문이 깊었을 뿐 아니라 인품이 고결강직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였으며 나라에 대한 충성심 또한 남달리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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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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