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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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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하

/만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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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1905년 당시 영주시 이산면 지동에서 출생하였다. 판서 유정(有定)의 후손이며 부친은 영호(永鎬)로서 엄격하고 의절(義節)있는 가훈(家訓)을 받아 평소 조국의 광복과 구국지염(救國之念)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1945년 광복으로 나라는 되찾았으나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을 크게 비통하게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자진할 것을 결심하고 1954년 제35회 3·1절을 기하여 "남북통일만세 갑오삼월일일 민국인 황병하(南北統一萬歲 甲午三月一日 民國人 黃秉河)"라는 유서를 품고 음독 자결하였다.

이러한 일이 당시의 대구매일, 대구일보 등의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고 나라에 대한 충렬을 죽음으로서 나타내었으니 그의 충정을 감히 짐작할 수 있고 그가 지은 아래의 한시(漢詩)는 이를 더욱 잘 말해 주고 있으니 아래에 소개한다.
"강토를 다시 찾는 일은 이미 늦었고, 이둔과 흥망을 누가 감히 가름하리오.
어느 날에야 이 땅에 성치를 얻으리오, 창생들의 큰 꿈은 다시 그 때를 기다리는데!
(還尋疆土事多遲 利純興亡誰可決. 何日靑邱得聖治 蒼生大計更圖時)"

더욱 그의 자결 결과를 당시의 지서장(支署長)과 이산면장(伊山面長)이 각각 상부에 보고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그 부친 황영호의 가훈을 받아 순수고결(純粹高潔)하였고, 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민족운동에 활약하였다. 8·15해방 후 국토양단과 민족사상 분열을 분개하여 남북통일을 절원(切願)하였으나 미취(未就)함을 분개하여 갑오삼일절을 기하여 자결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1958년 제39회 3·1절을 기하여 영주, 봉화의 각 기관장과 지방유지가 의열비(義烈碑) 건립을 발기하여 1960년 3월 1일에 그의 향리인 이산면 지동 주지산북록(朱芝山北麓)에 의열비와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만헌집(晩軒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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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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