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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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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벌(權扶)

충재(只齋)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안동
출생시기
1478년
출생지
1478년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자는 중허, 호는 충재, 본관은 안동으로 1478년(성종 9년)에 안동군 북후면 도촌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10살 때에 벌써 어려운 한문의 문장을 곧잘 맞추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세 때인 연산군 2년에 처음 진사에 뽑혔다가 30세가 되던 중종 2년에 별시병과에 급제하고 정9품의 권지부정자 종사랑의 직책을 받았다.

1514년에 영천군수를 지낸 3년 후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성균관 사성과 도승지를 거쳐서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이시대는 조광조가 임금으로부터 신임을 받으며 도학의 근본사상인 천일합일을 정치의 현실 속에서 완성시키려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때였다. 그러나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세력은 성급하고 그 기상이 지나쳐서 홍경주 등 연산군을 폐위시키는데 공이 있는 옛 세력과 서로 반목과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

선생은 지난 무오년과 갑자년의 처참한 사화를 생각하여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양쪽 세력의 갈등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풀릴 것 같지 않아 고심하다가 스스로 서울을 벗어나고자 강원도 삼척부사를 자원하여 갔다. 우려하던 대로 기묘사화가 폭발하고 이때 선생은 공직에서 파면되어 봉화읍 유곡리 닭실에 내려와서 살아갈 땅을 마련하고 이 곳에서 우울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15년동안 봉화에 은거하면서 경학에 몰두하다가 중종28년에 복직되어 밀양부사로 나갔으나 얼마 후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상복을 하고 향리에서 지냈다. 1546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인종의 외척 윤임과의 갈등으로 인해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은 서로의 반목을 해소하고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를 권하다가 또다시 파면된 후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몰려 전남 구례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그 곳에서 평안도 삭주로 옮겨진 이듬해(1548) 3월에 71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선조 임금이나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같은 이도 선생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평하였다. 명종 21년에는 지난 날의 모든 지위가 회복되었고 선조 2년에는 좌의정에 추서되고 선조 4년에 충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대명회전에서 잘못 기재된 조선 왕가의 혈통을 선조 24년에 고쳐서 인쇄한 속찬 대명회전이 출간되자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고 영의정과 일등공신의 녹권을 하사하였다.

성인이 된 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썼던 일기-한원일기 등 모두 6책-는 모두 450년전의 사회사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보물 제261호로 지정하고 후손 권정우가 보관하여 온다. 선생이 살아온 닭실에는 그가 49세 때에 지은 서재와 정자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어서 우리 나라는 이 곳을 명승 및 사적 제3호로 지정하여 국가의 문화재로서 보존에 힘쓰고 있다.

참고문헌 : 영남인물고, 국역충재문집, 매일신문(82.12.11 영남학파), 주간조선(82.12.26.유배지에서 심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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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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